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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고급음식 계란말이 그리고 인연

  • 연도2014년
  • 수상동상
  • 이름박배근
  • 소속원주민중병원

내가 군인이 되었던 1997년 봄을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로웠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훈련소에서 중위계급장을 달자마자 강원도 철원 눈도 채 녹지 않은 골짜기 어느 보병대대 군의관으로 발령 받았는데 어찌나 외진 곳인지 주변에 민가는 고사하고 다른 군부대도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고 당연히 대대 안에는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군생활 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 군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훈련소 동기들이 몇 명이 있다면 그나마 서로 위안이 되어서 힘들고 외로운 것을 참는다지만 내게는 그런 동기 하나 없었습니다. 그때처럼 사람이 그립고 가족의 따스함이 간절했을 때가 없었던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5월말 대대전체가 기동훈련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점심식사 때 쯤 되었을까요. 구급차 뒤 편 무전병이 2중대지역에서 이등병이 쓰러졌는데 상태가 심각하다고 급히 오란다고 외쳤습니다. 나중에 무전병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2중대장이 엉엉 우는 듯한 목소리로 얼마나 급했던지 암호도 쓰지 않고 평문으로 내 새끼 다 죽게 생겼어빨리 와라며 악을 쓰더랍니다. 응급환자가 발생한 지점은 차량이 접근할 수 없는 나즈막한 구릉이어서 100여 미터 전방에서 구급차에 뛰어내려 밭을 가로질러 환자에게로 뛰어갔습니다. 나중에 2중대장 천대위 말이 내가 뛰어오면서 메마른 밭고랑 몇 개가 먼지와 함께 무너졌고 환자 앞에서 슬라이딩 하다시피하며 뛰어오더랍니다. 전입 온 지 2주도 안된 이등병은 거의 호흡이 멎어 있었고 입안에는 객담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습니다. 기도삽관이 필요한 상황이라 응급상자를 열고 가장 중요한 후두경을 찾으니 후두경은 없고 기도삽관용 튜브 하나하고 점심때 쓸려고 의무병이 챙겼는지 숟가락 5개가 나란히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처럼 난감하고 황당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그냥 놔두면 생떼 같은 목숨 하나 속절없이 눈앞에서 놓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숟가락을 구부려서 후두경처럼 비슷하게 만들어 환자의 혀를 억지로 젖히고 내 등뒤에서 후라쉬를 비쳐서 기도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 황당한 기도삽관이 제대로 될 턱이 없어서 입안을 휘 젖는 숟가락으로 여기저기 상처 입은 환자의 입안은 금세 뻘건 핏물로 가득 차고 환자는 호흡부전이 더 심해져 청색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돌팔이가 사람 하나 이렇게 잡는가싶은 자괴감과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탓인지, 아주 잠깐 환자의 기도가 활짝 열린 듯 보이면서 그 틈을 타서 간신히 기도삽관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등병은 의식이 돌아오고 무사히 사단의무대로 후송할 수 있었습니다. 부대로 복귀하니 의무대 천막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는 2중대장 천대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기 부하 살려줘서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데 그 때처럼 환자 보호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후두경을 챙기지 못한 의무병의 무사안일함과 감독을 소홀히 한 내 잘못을 생각하자면 고맙다는 말도 과분한 것이 아닌가 지금도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그렇게 1주간의 야외기동훈련이 끝나고 토요일 오후 누구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관사로 돌아왔습니다. 훈련이 끝나는 토요일이면 총각장교들은 임관동기들끼리 읍내에 가서 목욕도 하고 술도 마시고 비디오방도 간다지만, 친한 사람 하나 없는 나는 그날도 온기 없는 관사 방 한구석, 벽에 기대어 TV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어둑어둑해지는 창 밖 하늘을 바라보는 일밖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저녁 7시쯤 배가 고파져 부대에서 가져온 건빵봉지를 뜯으려 했는데 옆 집사는 2중대장 천 대위가 자기 집에서 저녁 먹자고 부르러 왔습니다. 내가 사는 황량하고 남루한 관사에 비해 제대로 사람 사는 집 같은 그 댁 안방에서 돌 지난 딸아이를 등에 업고 천 대위 부인이 차려주신36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당선작 저녁밥상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윤기 흐르는 흰 쌀밥이 하얀 사기그릇에 수북히 쌓여있고 스팸을 넣은 김치찌개에 들기름 바른 김 구이, 노란 계란 말이, 경상도스타일처럼 젓갈이 듬뿍 들어간 김치그 중에서도 노란색 계란말이가 어찌나 맛있었는지요. 군대 다녀온 사람은 군대에서 계란말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군대식단은 계란말이 이렇게 써져 있어도 수백 개의 계란을 한번에 까서 큰 판에 부어버려 그냥 계란찜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식단표 아래에 단 부대사정에 의해 요리방법은 변할 수 있음”, 이렇게 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그때부터 내 입맛에는 계란말이는 무척 고급스럽고 맛난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느꼈던 포만감은 몇 달 만에 맛보는 사제(?)식사 덕이기도 하지만 천 대위 가정에서 느낀 따스함과 편안함 때문인 듯 하고 갓 돌 지난 딸아이를 무릎 팍에 안은 젊은 아빠의 눈에서 느낀 부러울 정도의 행복감 탓인 듯합니다.

그 맛있는 저녁식사 이후에도 몇 차례 천 대위는 나를 집에 불러서 저녁을 먹여주었고 김밥이라도 싸는 날이면 어김없이 접시 가득 김밥을 내 관사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해 가을 천 대위는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갔고 나 역시 3년의 시간은 금세 지나가 제대를 하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촌스럽게 느껴지던 강원도 어느 하늘아래에서 병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49. 정확히 어제 밤17년만에 그 고마웠던 천 대위를 만났습니다. 어제 사망 선고하였던 환자의 막내아들이 바로 천 대위였던 것입니다. 그는 내 얼굴은 알아보아도 이름은 기억 못했지만 난 그의 이름과 맹호연대 2중대장이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었지만 서로 반가운 얼굴로 굳게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커피 한잔 나누면서 예전 군대 이야기를 하며 그때 얻어먹은 저녁밥상을 아직도 기억한다하니까 지금은 예비군 동대장인 천 대위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합니다. 천 대위 부인도 나를 못 알아보고요. 그러나 난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원래 내가 중요하지 않은 자질구레한 일은 먼 훗날에도 꽤 정확하게 기억하는 편이니까요. 중요한 걸 잊고 살아서 그렇지만.

오늘 아침난 천 대위 아버지 병원비를 최대한 할인하라고 원무과에 말해두었습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원무과장에게 17년 전에 벌써 진료비를 받았다고 이야기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병원 장례식장 식당 여사님들께 그 댁 장례식 음식에 계란말이를 넣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왜 그러시나 하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더라고요.

45년을 살면서도 맹자니 논어니 솔직히 따분한 이야기인 듯 해서 끝까지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맹자에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

이젠 흰머리가 제법 많은 천 대위가 계란말이의 의미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그때 내가 고마워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내 마음은 19975월 어느 토요일 저녁만큼이유 없이 외롭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그때 그 날로 돌아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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