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내가 뵈었던 장 박사님
- 연도2014년
- 수상동상
- 이름전홍경
- 소속동산가정의학과의원
장기려 박사님은 수술을 시작하기 전 꼭 수술실요원들과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장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면 샤워를 하시고 강당에서 송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레퍼토리는 오솔레미오, 까로미오벤 등 다양했다. 직원들이 노래 소리에 매료되어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치면 박사님은 “오늘 수술이 잘된 것 같아서! 다음 기회에!” 하시곤 외과 외래로 종종걸음을 치며 가버리셨다. 복도와 대기실의 환자들은 대부분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라 함경도나 평안도의 사투리로 왁자지껄하여 마치 국제시장 한복판 같았다.
환자들 중에는 퇴원을 하며 “장 박사님, 수술을 잘해주셔서 살았습니다만 병원비를 다 내고 나면 집에 가서 양식 살 돈이 없습니다” 하소연을 하면 환자의 보호자처럼 원무과로 가 양식 살 돈 만큼만 돌려주라고 부탁을 하시곤 해서 원무과에서 애를 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번은 경남 하동에서 온 어부 김씨가 우측간엽을 절제했는데 수박에 검은 씨 박혀 있듯 간에 디스토마가 총총히 박혀 있었다. 하동 등지에서는 날것으로 밀물고기를 먹어 디스토마 환자들이 많을 때였다.
나는 그 절제된 간을 사진으로 찍어 장 박사님이 외과학회에 보고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환자는 장 박사님께서 자기 간을 너무 크게 떼어내어 힘이 없어져 어부 일을 할 수 없다며 생떼를 썼다. 장 박사님은 의학 공부에 도움을 줘서 고맙다 하시며 웃으면서 진료비 전액을 면제하고 퇴원시켰다. 이렇게 환자들의 편에 선 장 박사님의 병원 운영으로 한때 병원에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장 박사님이 산정현교회 장로시라 교인들 중 독지가들이 경제적인 후원도 했다. 또 장 박사님이 외과수술의 권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자 부유층의 환자들이 수술을 받으러 왔고 쾌유에 대한 감사 표시로 많은 금액을 희사하기도 했다.
196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는 병원 후원단체인 미국선교회와 주둔 미군들이 제공한 칠면조 요리로 식탁이 푸짐했다. 나는 처음으로 칠면조 요리를 맛보았다. 그날 장 박사님이 사택에서 성탄 이브를 즐기자고 하셔서 우리는 머리에 눈을 맞으며 사택으로 갔다. 장 박사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응접실에는 빵과 음료수 그리고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창했고 장 박사님은 사전에 약속된 특순 카로미오벤을 부르신 후 화이트크리스마스는 앙콜송으로 부르셨다. 내가 오락 순서를 진행했는데 장 박사님은 어린아이처럼 율동과 재롱으로 우리를 폭소케 했다. 모두가 어린아이들처럼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잠결에 비상벨이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원장님 사택에 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들은 병원 현관에 있는 눈삽이며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눈이 덮인 언덕 아랫길로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경비원이 사택 언덕 밑을 향하여 손전등을 비추며 “이 자식아, 빨리나와”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도 다함께 “새끼야, 빨리 나와!”를 외쳤다. 체격이 튼튼한 병리과 김 실장이 잽싸게 달려가 도둑의 멱살을 휘어잡고 박사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런데 “김 실장, 너무 과격하게 하지 말게, 우리 집 손님이야” 하셔서 김 실장은 멱살 잡은 손을 놓았고 우리도 모두 조용히 있었다. 나도 야구 방망이를 슬며시 뒤로 감췄다.
현관마루에는 도둑에게서 빼앗은 것인 듯한 의학 원서들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박사님이 “손님, 이 책들은 내가 공부하는 책인데 몇 푼 나가지 않아요” 하니 그 밤손님은 꿇어앉으며 어눌한 말투로 “이 놈은 무식합니다. 피난보따리 지고 온 지게로 시장에서 짐꾼으로 입에 풀칠하고 겨우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안식구가 또 아기를 낳았습니다. 쌀도 없고 미역 살 돈도 없고 얼음장 같은 방바닥 위에 어린 것들이 오들오들 떨며 울어대는 걸 보자 제 눈이 뒤집혀서 그만 도둑질까지 하였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며 울기 시작했다.
장 박사님은 “참 사정이 딱하군요. 우리가 이런 분들에게 베풂을 주어야 했는데…….”라고 했다.
“원무과장! 내 월급을 가불해서 좀 도와주어야겠어요. 그리고 빨리 이 분이 집에 갈 수 있도록 처리해주세요.”
강한 어투의 장 박사님 말씀에 원무과장이 준비하러 간 사이 장 박사님은 수건을 가져와 그 사람의 옷에 앉은 눈을 털어주며 “추위에 많이 떨었지요?” 하며 거실 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뜨거운 홍차를 따라주었다. 원무과장이 가져온 흰 봉투를 그에게 주며 “앞으로 돈이 필요하거나 어려울 때는 원장실로 날 찾아오시오” 하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그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 박사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성탄의 사랑과 평안을 기원한다며 일일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셨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밤손님이 병원청소부가 되었다. 그는 병원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 장 박사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며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싱글벙글 청소를 하고 다녔다. 늘 다정다감하고 인자하신 장기려 박사님의 밝은 얼굴이 오늘같이 눈이 오는 날에는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안경 넘어 눈빛은 자애로웠고 만나면 늘 미소를 짓는 동안이셨다. 장 박사님은 외과수술의 명의로 명성이 높으신 분이셨지만 “내가 수술을 하지만 치유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며 겸손해하셨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결성하고 부속병원을 운영하시던 장 박사님은 지병에 몸까지 너무 쇠약해져서 힘이 든다며 나에게 와서 도우라 하셨는데, 그때 나는 경기도 광주군 보건소장으로 결핵퇴치와 모자보건 및 나병관리, 특히 산아제한 시범 보건소로 바쁠 때였다. 가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가지 못했다. 나에게 의사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시며 사랑과 배려를 해주셨는데 조금도 보답해드리지 못한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 그분을 존경만 하였지 그의 그림자도 따르지 못한 것을 자탄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엔 그런 장 박사님이 더욱 그립다. 그리고 드릴 말씀은 존경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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