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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소리

  • 연도2014년
  • 수상금상
  • 이름박관석
  • 소속신제일병원
 ! 향기 좋다. 이게 무슨 꽃향기지?”

장미꽃 향기네요!”

그래 맞다. 난 이 향기만 맡으면, 우리 데이트할 때가 생각이나!”

당신 또 그 소리 하려고 그러죠? 이번에 말하면 벌써 백 번 째란 건 알고 있죠?”

아내가 내 말이 짓궂다는 듯 웃으며 가볍게 내 등을 친다. 아내와 데이트하던 시절 장미꽃 100송이를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에 없었나보다. 결혼 후 우연히 TV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장미꽃 100송이를 선물하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하자 아내는 당신이 언제 그랬어요란 말로 나를 황당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 후 장미꽃만 보면 그 때가 기억이나 아내를 놀리곤 했었다.

우리는 익숙한 향기나 음식, 물건을 통해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사건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추억의 팝송을 들으면서 당시 좋았던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남겨진 물건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아픈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늘 나는 내 가슴을 울렸던 어떤 소리를 통해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한 아이를 추억하려고 한다.

신경외과 인턴을 돌 때의 일이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밤이 되면서 제법 빗방울이 굵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턴 숙소의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날은 꼭 신경외과는 비상이 걸리게 마련이다. 교통사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낮부터 힘든 환자와의 싸움으로 지쳐 있던 내 삐삐가 사정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수술실에서의 응급 콜…….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벌써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날은 항상 밤을 꼬박 새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수술실 입구를 들어서는데, 밖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는 한 젊은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수술 방으로 들어간 내 눈에 수술대 위에 뉘여 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키에 앳된 얼굴로 보아 중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취가 시작되면서, 간호사와 주고받는 신경외과 선배의 대화를 듣고야 아이는 중학생이고 비가 오는 길에 학원을 마치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음주운전을 하고 가던 차에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술을 위해 개방된 뇌는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모르는 인턴의 눈으로 보아도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뇌부종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개골을 닫지 않은 채, 배액관 만을 삽입하고 수술은 끝이 났다.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이를 보호자가 따라왔다. 이미 과장님으로부터 수술경과를 다 들은 후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보호자는 나에게 아이의 상태를 다시 한 번 물어왔다. 이럴 때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작은 희망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에 갓 학생딱지를 뗀 인턴인 나에게까지 물어오는 엄마의 마음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힘내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가끔 저 아이처럼 심하다가도 기적적으로 깨어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울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이 말을 하는 것이 슬픔에 빠진 보호자에게 당시 인턴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긴 복도를 걸어가는 내 등 뒤로는 흐느끼는 아이엄마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동이 틀려면 아직은 한 시간 이상은 남아 있는 시간이었기에, 간간히 켜진 형광등 만이 I복도의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어제 늦은 수술로 채 몇 시간 눈도 붙이지 못한 터라 졸음이 밀려왔다. 힘든 발걸음으로 들어선 중환자실 입구에 어제 수술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침에 본 아이의 상태는 새벽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는 레지던트 선생의 표정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뇌사 상태로 갈 것 같아.” 아침 회진을 하는 과장님의 얼굴도 어두웠다. 의사로서 가장 어려운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비가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차가운 아침공기가 가운 속으로 파고들어와 몸을 가볍게 떨게 만들었다. 아니 긴장한 탓도 있으리라.

아이 엄마는 멍하니 서서 과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엄마의 다리가 무너져내리는 것이 보였다. 곁을 지나가면서 내가 어제 한 기적을 기다려 보자고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알지도 못하는 인턴으로서 보호자에게 괜한 희망을 준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책마저 들었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에 내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어서 흐려지던 하늘은 기어코 굵은 빗방울을 만들어냈다. 창밖은 어느덧 칠흑처럼 어두워졌고 바람까지 거세지더니,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가녀린 나뭇잎을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두운 복도 끝에 아직도 아이의 엄마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일어난 그녀의 몸이 휘청하더니 바닥으로 쓰러져갔다. 간신히 부축하여 의자에 앉힌 내 머릿속은 마치 거미줄처럼 뒤엉켜가고 있었다. 어떤 말이 아이 엄마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의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턴의 머릿속에서는 적당한 답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우리 딸은 정말 가망이 없는 건가요? 제발 저 불쌍한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

애절한 엄마의 부탁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 엄마를 바라보면서 같이 울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리 아이의 꿈도 의사였어요. 딸아이가 어렸을 때 아빠가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꼭 의사가 돼서 아빠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흑흑……. 그렇게 약속했었는데…….”

마음 한편이 아련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서였다. 당시 친할머니도 심장이 많이 안 좋으셨다. 심장판막증이라고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 하셨고, 마지막에는 심한 가슴의 통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을 고통에 신음하시곤 했다. 당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빌어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크면 꼭 의사가 되어 할머니의 병을 낫게 해줄 것이란 위로의 말밖에는…….

의사의 가운을 입은 지금도 몇 년 전 할머니에게 했던 위로밖에 보호자에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내 자신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이 내린 후의 중환자실은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아침에 수술했던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더니 결국에는 밤이 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중환자실 복도에서 잠시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 환자가 누워 있던 자리는 다시 새로운 환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리가 바뀌고 환자의 상태가 변화하는 와중에도 그 아이의 상태는 아침과 조금도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저 가끔씩 하는 경련만이 그녀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누구에겐가 얘기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밤새 찌는 듯한 더위가 새벽에야 잠시 주춤한 듯하더니, 아침이 되어서는 다시 온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긴 가운까지 입은 내 등으로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으로 축축이 젖어가고 있었다. 중환자실 복도를 지나가는데, 다시 아이의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는 듯 가벼운 목례를 하더니,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카세트 라디오였다.

선생님 혹시 이것을 제 딸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나요?”

이게 뭔데요?”

아이가 저 안에서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요……. 혹시 가능하다면 이것 좀 아이 옆에 틀어줄 수 있는가? 해서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간절한 엄마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의사로서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미안함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 손에는 테이프가 끼워져 있는 작은 카세트라디오 하나가 놓여졌다. 그리고 작은 하얀 이어폰과 함께…….

중환자실에 있는 아이는 경련을 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심해 보였다. 미다졸람(수면유도제)의 용량을 더 올리고서야 간신히 아이의 경련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아이의 상태는 전혀 호전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이의 응급상황으로 잠시 잊고 있던 내 손에 가운주머니에 있던 카세트 라디오가 만져졌다.

아이의 침상 옆으로 나는 그것을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어폰을 아이의 귀에 꽂은 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아이의 모습은 언제 경기를 했는지 모를 정도로 평안해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아이 엄마에게서 테이프를 하나씩 받았고, 다시 그것을 아이의 카세트에 바꿔 끼워줬다. 의사로서 그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하지만 그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나약한 인턴인 나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

선생님, 참 신기해요.”

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중환자실 간호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이가 저 테이프를 듣기 시작하면서 경기를 하는 횟수가 많이 줄었어요. 혹시 알아듣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녹음된 내용이 궁금해졌고, 결국 갈아 끼워 준 테이프 한 개를 집어 들어 카세트에 꽂았다. 그곳에서는 조용한 음악과 함께 아이 엄마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엄마야. 내 얘기가 들리니? 네가 처음 태어나던 날 참 눈이 많이 내렸단다. 세상이 하얀 도화지처럼 되었던 그 날, 너는 우리 곁으로 마치 천사처럼 와주었단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던 네가, 엄마 품에 안긴 채 젖을 빨면서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아직도 내 눈앞에는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구나. 참 네 아빠는 처음에 너를 만지지도 못했단다. 너무 작아서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너무 시간이 많이 흐른 뒤라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음악과 함께 들어 있던 내용은 그날그날 엄마와 아빠에게 일어난 일과, 또 아이가 자라나면서 겪었던 일들이 차례로 녹음되어 있었다. 어떤 날은 아빠의 목소리도 들려왔었다.

우리 딸, 네가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이 생각나는구나. 너는 무섭다고 아빠 곁에서 한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지. 아빠 허리를 잡은 채 말이다. 너를 학교에 떼어놓고 오던 길에 유난히 파란 하늘을 보던 아빠는 바보같이 울고 말았단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지금까지도 울보라고 놀리고 있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조용한 음악소리 뿐……. 아니 간간이 들리는 누군가의 흐느낌과 같은 소리가 음악소리에 묻혀 마치 노래 속에 나오는 가사와도 같이 들리고 있기도 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지만,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여름을 뒤덮었던 매미소리도 잦아지고, 짙푸렀던 녹음도 하나둘씩 가을의 옷을 덧입고 있었다. 초가을 어느 날 아침 매일 중환자실 앞에서 테이프를 주던 아이의 엄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두려운 마음에 급하게 들어선 중환자실 침대에 아이는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낀 채로 누워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아침에 아이 엄마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얼마 전 아이 엄마가 무심코 한 말이 아직 내 귀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테이프를 내손에 쥐어주던 아이 엄마는 뜬금없는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제 딸아이가 사고 나기 한 달 전쯤이었어요. 아이와 함께 TV를 보던 중에 장기기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한 아이에 대한 내용이 나왔어요.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데 기증자가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이 안타깝다는 내용과 함께……. 그 장면을 보던 아이가 갑자기 저에게 자기가 죽으면 장기기증을 해도 되냐고 묻더군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럼, 우리 딸이 엄마보다 낫네. 물론 되고 말고……라고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아이가 저렇게 된 건 아닌지 자꾸 죄

책감이 들어요.”

당시 엄마에게는 아니라는 위로의 말을 해주었지만, 혹시 아이 엄마가 다른 무엇인가를 이미 결정하고 한 말은 아닐까? 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의사로서 주변에서 장기 기증자가 부족한 것 때문에 항상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수없이 봐왔으면서도, 작은 아이가 했던 생각조차를 하지 못한 내 자신이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다음날 아침 중환자실 앞에는 여느 때와 같이 아이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초췌한 것이 한숨도 못잔 듯 보였고, 눈 주위가 부어 오른 것이 밤새 울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도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금세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 보였다. 아이엄마의 손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테이프 한 개가 들려 있었다. 그날도 나는 테이프를 갈아 끼다 말고, 아이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카세트의 볼륨을 올렸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 엄마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얘아, 엄마가 미안해. 며칠 전 선생님으로부터 더 이상 네가 가망이 없단 얘기를 들었지만, 아빠와 엄마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너에게는 더 큰 고통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이제 너를 보내주려고 해…….”

한참동안 카세트에서는 음악소리에 묻혀 작은 흐느낌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나지막한 아빠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우리 딸, 우린 영원히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부디 좋은 곳으로 가렴. 그곳에서는 절대 아프지 말고. 그리고 예전에 네가 말했듯이 아빠와 엄마는 어제 네 소중한 몸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기로 결정했단다. 많이 고민했지만, 네가 원했던 것을 해주는 것이…….”

순간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세트에서는 계속 아빠의 말이 흘러 나왔지만, 그 다음의 말은 내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마치 좋은 꿈을 꾸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는 듯 보였다. 엄마와 아빠의 결정이 맘에 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둠을 뚫고 먼 곳으로부터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빛 하나가 창문을 통해 중환자실을 밝혀주고 있었다. 새벽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해준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병원 앞 가로수의 나뭇잎들도 더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침 회진이 끝난 후 아이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작은 카세트 라디오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아이의 침대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카세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전에 내 귓가에 들리던 테이프 소리보다 더 큰 울림이 흘러나와 내 가슴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아이의 부모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결정한 것이다. 아이의 죽음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시간에, 더구나 자신의 딸을 사고로 잃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아무 것도 할 수조차 없었을 그 시간에, 그들이 했던 그 결정이 새로운 세 명의 생명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기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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