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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침묵하는 활시위의 염원

  • 연도2025년
  • 수상동상
  • 이름김하연
  • 소속하나로의료재단

메마른 싸락눈이 날리는 어느 날, 쌍의 중년 부부가 췌장암 다학제 진료실로 들어온다. 다소 피로해 보이는 남자의 뺨은 푸석하다. 눈가의 잔주름과 이마에 깊게 팬 고랑 몇 개가 세월의 무게를 알려주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 약간 노란 흰자위가 눈에 띄었다. 살짝 다문 입술에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받아들이려는 의연함과 동시에 체념하지 않으려는 결연한 다짐이 느껴졌다.

진료실에는 흰 가운을 입은 예닐곱 명의 의사들이 둘러앉아 있다. 부부는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으며 의사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다. 부인은 여러 의사들의 시선에 잠시 움츠러든 듯했지만, 이내 용기를 되찾고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조직 검사에서 췌장암으로 진단되셨어요.”

잠깐의 정적. 부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환자는 아내의 떨리는 팔 위에 자기 손을 가만히 얹는다. 그들의 얼굴을 뒤로 하고 나는 줄곧 만지작거리던 병력지로 시선을 돌린다. 각종 검사 결과가 빼곡한 가운데 며칠 전 내가 판독한 병리 보고서가 눈에 들어온다. Adenocarcinoma, poorly differentiated(저분화성 선암). 눈을 감으면 현미경을 통해 보았던 병리 슬라이드의 모습이 캄캄한 공간 위로 선명히 떠오른다.


암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암이 환자에 지우는 삶의 무게도 그렇지만, 병리의사인 내게는 암 진단의 과정 자체도 마찬가지다. , 악성 종양을 통칭하는 이 한 글자 안에는 수백 가지의 병리학적 분류가 있다. 암의 이름은 암세포가 기원하는 조직의 종류를 따른다. 이름이 붙은 암들은 각자 독특한 생김새를 지닌다. 병리의사는 전공의로서 수련 받는 4년 내내 암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법을 배운다. 이를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 병리 슬라이드 속의 풍경은 혼란스러운 세포의 배열로 보일 뿐이다.

인간은 얼굴을 보며 나이를 가늠하고, 성격을 짐작하고, 감정을 알아차린다. 지구 위에 인류가 등장한 이후 천억 개의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얼굴은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고유한 얼굴은 고유한 이름을 가진다. 현미경 렌즈 아래에서 암은 말없이 자기 얼굴을 병리의사에게 내보인다. 병리의사는 암에게 알맞은 이름을 붙여준다. 나는 매일 암의 얼굴을 읽는다.

암의 얼굴은 흉포한 맹장의 얼굴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는 흉악한 기세로 인체를 파고든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전장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짓밟으려 한다. 그는 승리에 눈이 먼 나머지 점령지를 풀 한 포기 다시 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든다. 암이 자라난 장기는 폐허가 되어 기능을 잃어버린다. 암은 주인의 생명을 꺼뜨리고 결국 자기 자신마저 공멸하고 만다.


오늘 여러 과의 의사들이 모여서 의논을 했어요. 이제 췌장암에 대한 치료를 진행할 것입니다.”


주치의인 소화기내과 의사가 설명을 시작하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진료실로 돌아온다. “복부 CT에서 췌장 머리 부분에 덩어리가 발견됐어요.” 영상의학과 의사는 재빨리 CT 영상을 빔 프로젝터 화면에 띄워준다. 그가 날렵하게 마우스의 휠을 돌리면 검은 바탕 위에 회색조의 장기들이 나비가 춤을 추듯 날아다닌다. “이 부분에서 조직 검사를 했습니다.” 마우스 커서가 흐릿한 덩어리를 가리킨다.

조직 검사는 인체의 작은 부분을 떼어내어 만든 병리 슬라이드를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관찰하고 판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건조한 진단 업무에 치이다가도 문득 마음속에 물음표를 띄우고는 했다. 내게 이 조직을 보내준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어떤 마음으로 진단을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한 줄의 진단명으로 내리는 선고가 그가 가던 길을 어떻게 뒤흔들까? 다학제 진료실은 슬라이드 뒤편의 얼굴과 삶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단은 췌장절제술이 필요합니다.” 수술을 집도할 간담췌외과 의사가 말을 이어 간다. “종양이 있는 췌장 머리 부분과 같이 담도와 십이지장 일부도 절제할 거예요.” 난도가 높은 수술이며, 여러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고, 경과에 따라서는 수술 후에도 장기간 입원해서 지켜봐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환자와 아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환자는 머뭇거리다가 묻는다. “잘 치료될 수 있겠지요?”


병리의사는 환자를 대면하지 않는 소수의 의사에 속한다. 처음 다학제 진료에 참여했을 때는 익숙지 않은 상황이 긴장되고 어색했다. 그렇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환자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으니까. 환자들이 진단에 절망할 때, 힘겨운 치료를 버텨낼 때, 임상의사들이 그들과 함께 격렬한 감정의 흐름을 견뎌내고 있을 때, 나는 고요한 판독실에서 커피 향기를 맡으며 슬라이드를 본다. 그들이 마주하는 격정의 폭풍우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을 수 있는 특권이 내게는 있었다.

나는 없는 사람처럼, 꿔다 놓은 건 아니지만 당장 쓸 데는 없는 보릿자루처럼, 빔 프로젝터가 비추는 영상의 그늘에 숨어 있다. 이따금 나도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내가 내린 진단으로부터 밀려드는 거친 고난의 파도에 휩쓸린 이들에게, 괜찮을 거예요, 라고 속삭여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진료실에서 말을 하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다.


부부의 그늘진 안색을 보고 쿡쿡 쑤시던 마음 한편이, 종양내과 의사의 온화한 말 한마디로 조금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다 같이 노력해 봐야지요.” ‘다 같이라는 말이 마음 속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진료실에서는 아무 말이 없지만, 현미경 앞에서 나는 암이 벌이는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는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겨난 암세포를 인체는 침입자로 인식하여 면역계라는 방어군을 소집한다. 암이 세력을 넓혀가는 가장자리는 치열한 전투의 최전방이다. 암세포보다 훨씬 작은 면역세포들이 종양 주변부에서 필사적인 대항전을 벌인다. 날선 창칼이 쉴 새 없이 부딪히고 시퍼런 불꽃이 튄다. 현미경 렌즈 아래 펼쳐지는 사투는 너무도 생생해서 허공을 찢는 꽹과리와 북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전장의 소란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말없이 전투의 현장을 지켜본다. 그곳에 내가 설 자리는 없는 듯해 등을 돌려 떠나려다가, 여태 손안에 단단한 활 하나를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활시위에 물린 화살은 효시(嚆矢), 날아가면서 높은 소리를 내며 신호탄 역할을 하는우는 화살이었다.


병마와의 싸움은 오롯이 환자 자신의 것이다. 의사는 대신 싸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최선의 방법을 찾아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암의 거센 공세에 아군이 지쳐 포기하기 전에 도착한 지원군이다. 그리고 병리의사는 지원군의 합류를 알리는 전령이다.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놓으면 화살은 전장의 창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새로운 개전을 알리는 화살이 손을 떠나면 전령의 존재는 이내 잊혀지지만, 나는 효시에 승리의 기원을 힘껏 실어 보낸다.

그럼 이렇게 치료를 진행하겠습니다.” 전략은 결정되었다. 이제는 계획대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환자와 그의 아내는 조용히 겉옷과 가방을 챙겨 들고 터벅터벅 출구를 향한다. 창밖에는 싸락눈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앉는 눈송이가 켜켜이 쌓여서 얼어붙은 땅을 감싸안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떠나가는 환자의 뒷모습에서 눈 덮인 겨울 전장의 함성을 듣는다. 현미경 속 열띤 전투의 현장을 떠올리며, 침묵하지만 염원한다. 고단한 싸움의 끝에 치유의 희망이 있기를. 때로는 외롭겠지만 늘 춥지만은 않기를. 전쟁이 잦아들고 언 땅에 승기를 꽂을 즈음에는 점차 눈이 녹기 시작하고 곧 생명의 푸른 빛이 만발하기를.


환자가 진료실을 나서면 의사들은 일제히 차트를 다음 장으로 넘긴다. 병원의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고, 환자의 연쇄는 끊어질 줄을 모른다. 환자가 떠나간 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빈 의자를 본다. 의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그 미지근한 체온이 미처 다 식기도 전에 다음 환자가 들어와 앉고, 조금 전과 비슷한 대화를 반복할 것이다. 빈 의자에 다음으로 앉을 사람의 얼굴이,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암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다음 얼굴의 주인은 누구든 될 수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자리에 앉을지 모른다. 진료실의 의자에 새로이 와 앉을 사람, 다시 찾아올 사람, 그리고 더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새로운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올린다. 활시위에 또 하나의 화살을 메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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