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겨울의 끝에서
- 연도2025년
- 수상동상
- 이름배철성
- 소속포항여성병원
동백은 애초부터 계획이 있었다. 겨울이라는 하얀 캔버스 위에 붉은 숨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시험했다. 삶과 죽음이 맞닿은 순간, 그 끝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리라는 걸 알았다. 동백은 향기를 버리는 대신, 더 깊고 짙은 붉음을 선택했다. 벌과 나비는 향기를 쫓지만, 동백은 그들을 유혹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작은 꽃들을 위해 벌과 나비를 보내고, 자신은 동박새를 부르기 위해 단 하나뿐인 절정의 붉음을 완성해야 했다.
그 색을 만들기 위해 동백은 끝없는 인내를 견뎠다. 단순한 붉음이 아니라,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오묘한 붉음’이 필요했다. 공기의 흐름, 바람의 탄생과 소멸, 한겨울에도 따스한 햇살과 칠흑 같은 어둠, 따뜻한 빗방울과 매서운 눈발까지, 모든 것이 필요했다. 뿌리는 흙의 기운을 빨아들여 꽃잎을 물들이고, 스스로 수천 번 붓질하며 붉음을 완성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백의 붉음을 볼 때마다 한 환자를 떠올린다. 그녀 역시 긴 시간을 견디며,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약 25년 전이었다. 40대 초반의 여성이 자궁출혈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쇼크 상태였다. 보호자는 그녀가 임신한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해 보니, 정상보다 두세 배 커진 자궁 안은 태아가 아닌 피로 가득 차 있었다. 자궁을 살짝만 눌러도 핏덩어리가 하얀 시트 위로 울컥울컥 쏟아졌다. 마치 눈밭 위로 떨어지는 동백꽃 같았다.
곧바로 수술과 치료를 병행했지만,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자궁적출술을 결정해야 했다. 응급 수술 후 출혈은 멈췄지만, 임신 호르몬 수치는 30만 단위를 넘었다. 융모상피암이 의심되었고, 정밀 검사 결과 뇌까지 전이된 말기 암이었다.
그녀는 이후 3년 동안 시난고난 병원과 집을 오가며 항암 치료를 받았다. 마지막 해에는 거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시피 했다. 어느 날, 나는 회진을 돌다 그녀의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창가 쪽 침대에서 그녀는 한 손으로 커튼을 살짝 젖히고, 겨울 햇살이 번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인기척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내 물음에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오래된 상처처럼 조용히 스며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요… 그냥, 바람이 좀 덜 차네요. 그거면 된 거죠, 뭐.”
말끝에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병원비 조금이라도 줄일 방법은 없을까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이미 세 번의 심폐소생술을 견뎠고, 몸은 쇠약해져 손끝조차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질문엔 단순한 계산이 아닌, 남겨질 이들을 향한 마음이 묻어 있음을 직감했다.
“가능한 보험 적용은 최대로 해드리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애들이 아직 어려요. 내가 이렇게 오래 누워 있는 게… 미안해서요.”
말끝이 조용히 떨렸다.
“요즘은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건 내가 살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아이들한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버티는 건 아닐까… 하는.”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선생님은… 죽는 게 무서우세요?”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질문을 미루지 않을 얼굴이었다.
“무섭다고 해야 하나요. 솔직히, 어떤 날은 괜찮을 것 같고, 어떤 날은 무서워요. 마음이 왔다 갔다 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그래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이 긴 싸움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게 지치는 거예요.”
그녀는 창밖을 향해 손을 내밀 듯 바라보았다.
“하루하루가 계속 싸워야 하는 날들이니까요. 이겨야 한다는 말이 꼭, ‘지지 말라’는 채찍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문장을 천천히 읊조리듯 깊었다.
“사실은요… 그냥 쉬고 싶어요. 하루만이라도, 아무 말도 없이, 숨만 쉬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이상하죠. 이렇게 힘든 날에도요, 가끔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렇게라도, 아직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어서요.”
그 말은 내 가슴 깊은 어딘가를 가만히 건드렸다.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해줄 게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겪었을 기나긴 투병과 거의 버티다시피 한 삶을 떠올렸다. 죽음은 패배인가? 아니면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인가? 우리는 태어날 때 선택권이 없지만, 떠날 때만큼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로부터 며칠 뒤, 새벽이 막 지나려던 시간이었다. 응급 호출을 받고 병실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의료진이 분주하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고 몇 분이 지나 그녀는 다시 의식을 찾았다. 의료진이 자리를 비켜주자,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고 차가웠지만, 그는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힘들게 거의 다 갔는데, 다시 데리고 와 버렸네.”
그녀는 힘겹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에는 다시 데리고 오지 마세요.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 누구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그녀는 스스로 내렸다. 그녀는 더는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
툭!
잘려 나간 꽃이 땅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진동이 여운을 남겼다. 바닥에 닿았지만, 꽃잎은 흔들리지 않았다. 떨어진 꽃은 여전히 오묘한 붉음을 간직한 채였다. 바닥에 닿은 동백꽃의 봉오리에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다. 마치 바람이 다녀간 자리처럼. 동백이 꽃봉오리째 떨어지는 이유는 단순한 생의 종결이 아니다. 꽃이 절정을 맞이한 순간, 가지는 열매를 품기 위해 꽃을 내려놓는다. 꽃과 열매를 모두 지탱할 수 없기에, 스스로 꽃을 떨구고 다음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다. 동백의 붉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동백꽃은 끝없는 인내로 붉음을 완성했다. 그 붉음은 단순히 생명력의 상징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동백이 꽃잎을 떨구고 나면, 그 자리에 여전히 붉은 잔해가 남는다. 마치 환자가 마지막까지 살아내며 온몸에 채워진 고통이 그 고요한 붉은 흔적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붉음이 그녀를 이루는 존재의 본질처럼 느껴졌다. 동백꽃이 붉음을 완성하고 떨어지는 순간, 그 본질은 시간의 끝자락에 남겨진 모든 것들의 생명력이다. 숨결을 멈추고, 이미 지나온 길 위에 놓인 것들이다. 결국 생명력은 '내려놓음'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환자가 겪은 끝없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내려놓으며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생명의 흐름에 동백은 남다르다. 엄동설한 속에서 바람은 칼날을 벼리고 벼렸다. 그리고 그는 절정의 순간에 자신을 스스로 던질 각오를 한다. 새들이 오묘한 붉음을 찾으려 하지만, 수분(受粉)의 목적을 다한 꽃은 욕심을 내려놓는다. 더는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먼저 태어난 목숨의 숙명이다.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든다. 그리고 속이 빈 꽃봉오리를 통해 하늘을 본다. 그 속으로 부드러운 봄빛이 내려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