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아침의 가족
- 연도2025년
- 수상동상
- 이름서정국
- 소속중앙대학교병원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밑바닥이 보일 만큼 투명했다. 내 아버지가 그렇고 내가 그렇듯 할아버지의 눈동자도 갈색이었을 테지만, 기억 속 할아버지의 홍채 가장자리는 오래 벼려낸 칼날처럼 푸른빛이 감돌았다. 내 동생이 당신을 넘어서기 전까지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가장 키가 컸다. 다들 할머니를 닮아 낮은 이마에 억센 턱, 그다지 크지 않은 키를 가지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우리보다 한 뼘은 더 컸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꼿꼿한 나무나 장승처럼 높아 보였다. 할아버지는 부산의 옛 동헌, 동래읍성 아랫마을에 살았다. 할아버지 이름의 마지막 한자는 아침 조(朝) 자여서, 우리는 스스로를 아침의 가족이라고 불렀다.
아침의 가족들은 동래에 모여 살았다. 손녀 손자들은 아침마다 할아버지댁에 들러 안부를 여쭙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할아버지가 교직에서 퇴직하고 아침의 가족들이 하나 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갈 때, 막내아들이었던 내 아버지는 동래와 가까운 구서동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예과 2학년일 때 폐암 진단을 받았다. 젊을 때부터 피웠던 담배가 원인이었다. 나는 하굣길 지하철에 구서동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래에 내려서 할아버지 집을 종종 들렀다. 아무런 핑계도 없이 놀러 갈 순 없어서 할아버지와 책을 한 권 만들기로 했다.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대학생을 위한 사자성어 외≫ - 서석조, 서정국 공편
≪大學生을 爲한 四字成語 外≫ - 徐錫朝, 徐正國 共編
그냥 사자성어 책이 아니라 퀴즈 형식으로 만든 책이었다. 사자성어 중 한 글자를 틀린 글자로 적어 두고 어느 글자가 틀렸는지, 정답은 무엇인지 쓰도록 공란을 두었다. 그 아래에는 올바른 사자성어와 성어의 뜻풀이를 써넣었다. 퀴즈를 만드는 일은 내 역할이었고 사자성어를 정하는 일과 뜻풀이를 쓰는 일은 할아버지의 역할이었다. 총 598개의 사자성어를 수록하고 맨 마지막에는 암송할 만한 도연명이며 두보의 한시를 몇 편 부록으로 실었다. 우리는 100부 정도를 인쇄해서 집안사람들과 친척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것은 나눠 가졌다.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옛 벗들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로 주는 일을 뿌듯하게 생각하였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바빠졌고 할아버지는 상태가 조금씩 나빠졌다. 할아버지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길 반복했다. 기력이 쇠하면서 기도와 식도를 구분하는 후두덮개의 기능이 떨어졌다. 숨 쉬는 일과 밥 먹는 일이 문제가 되었다. 자칫 둘이 뒤섞여 숨 쉬는 기도로 밥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심각한 폐렴이 올 수도 있었다. 가족들은 병원에 모여 할아버지와 함께 이 문제를 상의했다. 우리는 기도에는 구멍을 뚫어 숨 쉬는 길을 확보하고, 위장에는 바깥의 피부로 이어지는 위루를 만들어 그리로 영양을 공급하기로 했다. 할아버지의 목과 배에 구멍이 하나씩 뚫린 날, 나는 할아버지의 오후 간병을 맡았다. 기도에 뚫린 구멍으로 힘겹게 숨을 쉬면서도 할아버지의 눈동자 가장자리는 날 선 푸른빛으로 형형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할아버지 병실에 들렀다. 간병인이 쉬러 가는 날이면 할아버지 식사는 나의 담당이었다. 위루로 연결된 주사기에다 영양제를 담아 천천히 위장으로 흘려 넣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너무 앉아만 있어서 소화가 안된다며 일으켜 세워 달라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겨드랑이에 팔을 밀어 넣어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할아버지는 혼자 서지 못해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댄 채 양 손으로 나를 살짝 껴안았다. 내 품에서 고개 숙인 당신은 어느덧 나보다 작아진 듯했다.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단정히 빗어 넘긴 흰머리에서는 어릴 적 뛰놀던 동래의 멀고 아늑한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나는 당신의 마지막 모습들을 기억한다. 당신은 의식이 있던 마지막까지 글 한 편을 붙잡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시였다. 붉은 해가 지는 정경을 그린 시였다. 그리고 꺼져가던 할아버지 눈동자의 푸른 불꽃. 풍화를 마치고 오랜 생을 마무리하는 거대한 나무. 거목의 느리고 고요한 쓰러짐. 당신이 책이라면, 나는 그 모습들이 당신에게 걸맞은 위엄을 품은 마지막 문장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하루는 아침으로 시작한다. 새벽을 열고 세상에 첫 빛을 들이는 아침. 누워있던 대기를 깨우고 선선한 바람으로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 내 유년 시절의 하루는 할아버지와 함께 시작했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학교로 가던 아침의 등교길. 우리가 댁을 나서면 할아버지는 뒷마당으로 나와 우리가 학교로 가는 모습을 눈으로 바래다주곤 하였다. 그렇게 서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내게는 아침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보였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시작된 우리 아침의 가족에게 작년에 첫 손주가 태어났다. 내 딸, 우리 아침의 가족의 첫 손녀의 이름을 나는 하루라고 지었다. 이제 갓 한 살이 된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면 아침의 햇살보다 환하게 웃는다. 하루를 품에 안고 그 작은 몸에 코를 파묻어 냄새를 맡으면 그리운 아늑한 냄새가 난다. 하루의 눈동자는 동그랗고 깨끗한 거울 같아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하루의 눈 속에 있는 내가 비추어 보인다.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서린 어슴푸레한 새벽빛은 사라지지 않고 세대를 건너 나에게서 하루의 깊은 갈색 눈동자 속에 깃들었을까?
할아버지와 함께 책을 만들었던 시절의 반짝이는 기억은 내게 주어진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빛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런 기억일 것이다. 나는 언젠가 하루에게 이 모든 빛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너의 이름이 어떤 아침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너의 웃음이 왜 아침 햇살을 닮았는지. 할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기 위해 책을 만들자고 하였듯, 나 또한 책을 만들겠다는 핑계로 너와 함께 있겠다. 우리가 만들 책 속에서는 키 큰 장승이 입구를 지키고 정겨운 동래의 냄새와 우리 아침의 가족들이 살아온 빛나는 기억들이 책장 사이사이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끝에는 내가 이렇게 적어 두겠다. “이제부터는 아침이 있었기에 시작될 수 있었던 한 아이의 눈부신 하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언젠가 네가 스스로 첫 문장을 쓰려고 할 때, 두려움 없이 너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밝히는 새벽빛을 담은 등불이 되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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