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 연도2024년
- 수상동상
- 이름이영준
- 소속삼성이영준비뇨기과의원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나가는데 막 문자가 들어온다.
“저희 아버님 H 씨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새벽에요.”
문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탁 막혀왔다. H 씨,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 속삭였다. 아픔 없는 곳에서 자유하시기를, 송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용서를 빌고 또 빌며 그분의 영혼을 축원했다.
2002년 서산의료원에서 비뇨기과 의사로 근무할 때였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비뇨기 환자가 왔는데 응급의학과에서 보기 힘들다고, 직접 나와서 해결해달란다. 필자가 전립선비대증을 요도 내시경으로 수술했던 환자였다
환자는 65세로 비교적 젊고 건강했다. 그날이 수술 후 3일째였는데 급성 출혈로 인해 급성요폐가 온 것이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방광을 세척하려고 소변줄을 삽입하는데 자꾸 피딱지에 막혀 실패하니까 비뇨기과 의사를 호출한 것이다.
20번 소변줄이라 가늘어서 피딱지가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24번 소변줄을 넣으려 시도하였다. 그런데 들어가지 않아 22번 소변줄로 다시 시도하였다. 또 실패하였다. 할 수 없이 처음에 썼던 20번 소변줄을 다시 삽입하는데, 들어가던 소변줄인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요도에 소변줄을 넣을 때마다 환자는 “나 죽는다, 배가 터질 것 같다”라고 소리쳤다. 환자가 고통으로 요도에 힘을 주어서 그렇겠지, 생각한 나는 마취과의 도움을 받아서 척추마취를 한 뒤 폴리스타일렛이란 장비를 사용하여 22번 소변줄을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일주일 동안 소변줄 주변으로 피가 나왔다. 혹시 외요도 괄약근이 파열된 것은 아닐까, 몹시 걱정되었다.
일주일 뒤 소변줄을 제거하자 환자는 “어휴 이제 살겠습니다. 정말이지 응급실에서 과장님 아니면 죽을 뻔했습니다. 아니 응급실 선생님들은 소변줄 하나를 못 넣어요? 그것이 그렇게 힘든 겁니까!” 하고 물었다. 마취의 결과가 환자에게는 나의 능력으로 인식되었고 그날 나의 행위가 앞으로 어떤 일을 가져올지 나는 터럭만큼도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응급실 치료 일주일 뒤 환자가 외래로 왔다.
“과장님, 어찌 된 일인지 소변이 계속 흘러요. 마려운 느낌도 없어요. 하루에도 기저귀를 열 개는 더 버리는 것 같아요. 수술 전에 과장님께서 처음 며칠 동안은 소변이 흐를 수 있다고 했는데, 언제쯤이면 멈출까요?”
환자의 질문에 ‘아이쿠 이거 내가 큰 사고 쳤구나!’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소변이 흐르는 것은 폴리스타일렛으로 소변줄을 밀어 올릴 때 외요도 괄약근을 파열시킨 결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응급실에서 소변줄 삽입을 시도하여 여러 번 실패하였으면 방광에 소변줄을 꽂는 방광루를 설치했어야 했다. 그리고 몇 주가 되더라도 요도의 상처가 스스로 아물기를 기다렸어야 했다. 그게 정답이었다. 그러나 20년 전 나는 정답을 몰랐다.
전립선비대증을 수술할 때마다 나는 그때가 떠올라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왜 방광루 요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로 인해 환자는 오랫동안 기저귀를 차고 힘들게 살아야 했는데 병원에 오면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모든 게 당신 업보라고 했다. 수술 후 합병증으로 발생한 요실금 상태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분은 1년이면 한두 번 내원하여 “신기하게 2~3일 전부터 요실금이 싹 없어졌다”라며 좋아했다. 소변검사를 해보면 요도염이 심했다. 심한 염증으로 요도 점막 부종이 일시적으로 외요도 괄약근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했다. 항생제를 사용하여 요도염을 치료하면 다시 요실금 상태가 되었으니까. 성기 주변은 기저귀 사용으로 습했고, 회음부는 곰팡이 증식으로 가려움증이 심하였다. 그렇게 그분이 11년 동안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2013년 봄 비뇨기학회 세미나에서 전립선암 수술 후 발생한 요실금 환자에게 인공 외요도 괄약근을 심어 치료한다는 희소식을 접했다. 기쁨에 들뜬 나는 얼른 전화했다. 하늘에서 주시는 큰 선물 같았다.
“내일 당장 우리병원으로 오세요. 제가 치료해드릴게요.”
다음 날 나는 종일 그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알았다고, 가마고 하셨던 그분은 퇴근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전화하기를 여러 번, 역시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분의 주소지로 직접 찾아갔다.
“이젠 적응이 되어 그런대로 살아요. 제겐 요실금이 걱정이 아니라 저놈이 걱정이에요.”
그분이 가리키는 마당에는 신발로 땅을 파며 놀고 있는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
“우리 막내랍니다.”
76세인 그분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딸 넷은 출가하였고, 부인은 1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셨으며 지적장애가 있는 막내아들과 둘이 살고 있었다. 결국 병원에 오려면 누군가 막내아들을 돌봐줘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어 못 온 것이다.
사정이 참으로 딱했지만 그래도 나는 꼭 치료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자유로울 수 있을 터였다. 대학병원으로 가서 인공 괄약근 수술을 하자고 설득했다. 요실금 없이 살 수 있다고 자세히 설명도 했다. 그분은 아들을 돌볼 사람도 없고 그렇게 큰돈을 들여 수술할 처지도 아니라며 거절했다.
“시간만 내셔요. 저는 어르신 수술 이후 지금까지, 11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니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할 테니, 아드님도 어떻게 하든 제가 돌볼 테니, 시간만 내주셔요.”
간청하고 또 간청했다.
“아닙니다. 이젠 요실금은 걱정이 아닙니다. 저 아이가 걱정입니다.”
그분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이후에도 여러 번 전화해서 수술하자고 권했다. 그때마다 “원장님 성의 알았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뿐 그분은 끝내 오지 않았다.
찾아오는 환자 중에 같은 동네 사람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분의 안부를 물었다. 심장이 안 좋아서 약을 잡수신다고 했다.
“아들은 좀 떨어지는 애가 있었지, 아마 몇 년 되었을 거야. 동네 저수지에 빠져 죽었어. 이젠 혼자 살어. 딸이 넷 있는데 시집가서 다들 경기도 어디에 살지 아마.”
다음 날 나는 다시 전화했다. 이제 수술하기는 연세가 많지만, 어찌 사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라도 도울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알아보니 요양원에 계신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 그분 소식이었다.
소천하셨다는 소식에 송구스러움이 다시 샘솟는다. 그분이 감당한 고통을 내가 어찌 다 짐작할 수 있을까. 내가 침착하게 하복부에 방광루를 설치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나의 경솔함으로 인한 그분의 고충을 어찌 다 갚아야 할까.
수술할 때 내시경으로 섬세하게 살피면서 전립선 출혈 부위를 지혈했더라면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 2013년도에 서울에 가기 싫어하시던 그분을 우리병원으로라도 모셔서 용기 내어 내가 직접 인공 괄약근 수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랬더라면 조금이라도 편히 사실 수 있지 않았을까.
섭생의 문제일까, 환경의 문제일까 아니면 장수하기 때문일까, 5년여 전부터 노인 전립선비대증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환자를 볼 때마다 나는 그분이 떠오른다. 그래서 수술 전날, 잠자기 전 환자의 전립선 초음파 이미지를 되새기면서 가상현실에서 수술을 시행한다. 그리고 다음 날 빚진 자의 마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간다. 그분의 전립선이라 생각하며 최대한 빨리, 출혈은 최소화하면서 아주 얇게 깎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나의 기술은 향상되었고, 환자들은 빨리 완쾌했다. 이는 전적으로 그분이 치른 희생의 대가였다. 수술이 잡힐 때마다 가상현실에서 수술에 임하는 것도 그분이 가르쳐준 의사로서 자세다.
한동안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는 아픔 없는 곳에서 자유하시기를, 송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꾸만 속삭였다. 목울대가 뻐근해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