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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저는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요

  • 연도2024년
  • 수상동상
  • 이름임미정
  • 소속도담정신건강의학과의원


봉직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개원 준비에 들어가던 때의 일이다. 진료하던 환자들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 유독 이별을 두려워하는 이가 있었는데, 나라는 치료자가 없으면 어떻게 될 지, 새로운 치료자와 잘 해 나갈 수 있을지 매우 두려워하였다. 나는 그녀가 다음 치료자와도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그녀의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으로, 내가 지금 당분간 진료를 해드릴 수 없지만 몇 개월 후 여기에서 아주 멀지 않은 곳에 진료실을 열 것이며 그녀가 새로운 치료자에게 적응이 안 되고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불안이 가라앉았다. 원한다면 찾아갈 수 있는 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껴서, 새로운 선생님과의 치료에 도전해볼 용기가 생긴다고 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잘 지내고 있는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접근 가능한 곳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두렵게 느껴지는 모험에도 도전할 수 있다. 혹시나 실패해도 위안받고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용기 내어 새로운 치료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그녀의 도전을 응원하면서도 기왕이면 그녀의 치료를 맡았던 내가 계속 그 역할을 제공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쉬움에서 출발하여 마음을 다친 이들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올 수 있는 고정된 자리가 되도록 나만의 진료실을 오픈했다. 지역사회에서 의원을 연다는 것은 생각보다 진지한 다짐을 필요로 한다. 이 지역사회에, 이 장소에 평생 발을 붙이고 여기 거주하는 환자들과 함께 늙어가겠다는 결심이다.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싶다 해도 여간해선 어려울테고 장기 여행은 아주 큰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혹시 힘들거나 괴로워도 떠나거나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의 일생을 선택했다면 감내해야 할 몫이다.


나는 정감이 가는 지역을 찾아 나만의 스타일로 시스템을 구축했고, 다행히 많은 분들의 마음을 치유하도록 돕는 터전으로 자리 잡혔다. 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런 감사한 성과들이 있었고 하루에 수십 명의 환자들이 밝은 표정을 짓고 병원을 다녀가는 걸 보면 가장과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병원은 안정되게 운영되고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하여 병원을 만들어가던 시기가 지나고 여러 사건, 사고도 무사히 지나갔음에도, 어쩐지 나는 편안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 잘 시간, 밥 먹을 시간도 없던 개원 초기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고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진료를 하는 것은 숙달된 일이라 적절히 듣고 공감하는 반응을 하고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만 본래 내 자신과 분리된 느낌으로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잠을 자도 편하지 않았고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에게 이명이 흔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겪게 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새삼 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정신과 진료에 있어서는 특별한 치료기구가 있지 않다. 내 귀와 입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 귀에 과부하가 왔는지 경고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고작 2년 지났는데 벌써 번아웃이 온 걸까? 사실 야간 진료를 따로 정하지 않았음에도 거의 매일같이 저녁 8시 넘도록 진료를 했으며, 점심과 저녁 식사를 제 때 먹기에도 벅찬 하루하루가 지속되어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으니 가능성이 없지 않다. 환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직원들과 경제 시스템을 포함한 병원 생태계에 대한 책임감, 간간히 컴플레인에 대응하고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고민, 틈틈이 완수해야 하는 행정 작업 등 진료 외 여러 문제에 익숙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무거웠다. 각오하고 시작했지만, 눈이 하얗게 쌓이고 벚꽃이 하늘거려도 이 작은 진료실에서 해가 질 때까지 틀림없이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에 가끔 숨이 막히기도 한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매일 출근하면 예약 상황이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크고 작은 고통과 갈등을 안고 나를 찾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루하루 댐의 구멍을 막는 심정으로 진료실을 연다. 매일 늦게 퇴근하고, 돌아가면 녹초가 되어 있으니 가족들도 걱정스러워한다.


주말을 앞둔 토요일 오후, 몰아치는 진료를 간신히 끝냈다. 마지막 처방 창을 닫고 나서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뱉는다. 파아... 그리고 깨달았다. 아, 오늘 아침에 들숨을 쉬고 나서 5시간 동안 멈춰 있다가 지금에야 날숨을 뱉고 있구나. 그야말로 잠수한 느낌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숨을 멈추고 진료시간이 끝날 때까지 움…... 파!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잠수하듯이 몇 십년을 버틸 수 있을까? 개원한다는 것은 이 자리를 평생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인데, 이 약속 지킬 수 있을까?


그 날도 진료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8시께였다. 불안에 사로잡혀 일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던 청년인데 어느덧 취직을 해서 이제 마감 시간 무렵에야 올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당분간은 그리해도 되지만 나의 체력이 달려서 차후에 전체 진료시간을 줄일 수도 있겠다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은 근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지치지 말아주세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치지 말아달라는 그 음성에는 치료자를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내가 이 작은 방에서 매일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는 사람을 잘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수 개월, 혹은 수 년이 넘는 긴 치료기간을 성실히 이행하고 종결을 맺을 때가 있다. 이미 환자 분은 증상에서 회복된 지 오래고, 유지치료 기간동안 어떻게 병을 이겨내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삶을 살아가느냐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정들어 아쉽게 작별하는 순간이다. 더 이상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시원한 마음과 앞으로는 혼자 삶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두려운 마음이 뒤섞여 진료실 떠나기를 주저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는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요."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여기 나의 작은 진료실이 그런 자리가 되길 바란다. 언제든 원하면 찾아와서 속엣말을 할 수 있고, 즐겁고 편안하게 마음의 비밀을 탐색할 수 있는 곳. 한결 같이 밝은 모습으로 그를 환대하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치료자가 있는 곳...... 나 역시 그런 곳을 갖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다. 

잠수하는 마음이 아니라 유영하는 마음으로,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빼고 깊은 숨을 내쉬어 본다. 과도한 부담과 책임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다. 주말에는 밀린 일들을 생각하지 말고 온전히 휴식을 취해야겠다. 나와, 나의 사람들을 위해 진료실을 오래 지켜 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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