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거리두기
- 연도2024년
- 수상은상
- 이름안희준
- 소속울산대학교 강릉아산병원
거리두기라는 말에 익숙해지기 훨씬 오래전의 일이다.
예년처럼 의과대학 학생들이 병원 실습을 나왔다. 나는 학생들에게 종양내과에 대한 교육을 하고 마지막 수업시간에 궁금한 것 있으면 편하게 질문하도록 했다.
한 학생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은 종양내과 의사로서 어떤 게 가장 힘드세요?“
나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힘든일이 없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회피하고 싶은 생각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생의 질문에 진지한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거리두기”라고.
그리고 기억 속의 한 환자가 떠올랐다.
내 어머니 연배 쯤 되어보이는 환자가 폐암 4기를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위해 진료실로 들어왔다. 체구는 작지만 무척이나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던 듯 짙은 주름이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몇 가지 증상에 대한 나의 물음에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검사결과 환자는 표적항암제의 적응증이 되었다.
“종양세포에서 특별한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는데 먹는 표적항암제에 잘 듣고 부작용도 보통의 항암 주사보다 훨씬 덜합니다. 힘든 상황이고 무거운 병이지만 잘 치료 받으면서 힘을 내 봅시다.”
환자는 치료를 잘 받겠노라 했고 내가 묻지 않았지만 병이 나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도 했다.
기대만큼 항암치료 효과도 좋았고 증상도 많이 좋아졌다. 환자는 한 달에 한 번씩 외래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으며 순조로운 치료과정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환자는 예고없이 약속된 외래 진료에 오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여전히 환자는 더 이상 진료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많은 환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
대여섯 달 쯤 지났을 때 환자가 다시 외래로 왔다. 그간 치료를 받지 않으면서 병세가 많이 나빠져 있음을 나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숨이 많이 찬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표정도 좋지 않았다. 타지에 사는 따님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온 듯했다. 나는 그간 왜 진료를 보러 오지 않았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환자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게 화가 났는지, 아니면 세상에 화가 나 있었는지.
한참을 말이 없던 환자는 내 앞에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몇 달 전 함께 살던 아들이 집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그렇게…그렇게 그 길로 떠났다고 했다. 겨우 말을 이어가며 아들을 먼저 보낸 어미가 살아서 무엇하며 치료가 무슨 소용이냐고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쏟아냈다.
나의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고 어떠한 설득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무기력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환자의 두 손을 꼭 잡아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고작이었다. 위로가 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런말이 튀어나왔다.
“제가 기도를 해드려도 될까요?”
환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무어라 기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진심으로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환자는 진정을 하고 따님의 설득으로 다시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몇 주가 지나고 환자는 안정을 찾아갔다. 병의 경과도 다시 회복세를 보이며 이전처럼 잘 지내고 있는 듯 했다. 궁금하셨던지 어느날 환자는 진료실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가볍게 내게 물었다. 사실 진료 이외에 나의 사생활 영역에 대한 질문은 솔직히 반갑지는 않다. 내가 일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시간에 우연히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을 마주치는 일은 조금은 불편한 일이며 일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조금은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얼버무리듯 일러드렸다. 그러나 꼭 오시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몇 주가 흘렀을까, 결국은 주일마다 환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과 부담스러운 마음이 공존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병원이 아닌 나의 사생활의 일부인 영역에서 환자를 마주하는 일이 생긴 셈이다. 식사를 하고 계시면 자연스럽게 함께 앉아 식사하며 이번주는 아픈데는 없었는지, 약은 잘 드시는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렇게 매주 조금씩 편해지고 식사를 하며, 할머니가 지난 세월 살아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할머니는 젊어서 홀로 되었지만 악착같이 살았으며 자식들을 열심으로 키웠고 세 아들과 딸, 손주들도 잘 자라주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학창 시절에는 제법 똑똑하다는 말도 듣고 학생 대표를 한 적도 있다고 수줍은 자랑도 하시며 주름진 얼굴에 소녀같은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는 할머니가 돌보아야만 할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다는 얘기도 어렵게 풀어 놓으셨다. 끝까지 치료를 받아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그렇게 이 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내겐 할머니와 조금 더 각별해 지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폐암이란 병의 예후는 기적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의학적 통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열심히 치료를 감내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의 병세는 나빠져갔고 추운 계절이 두 번쯤 지나갈 때쯤 할머니는 더 이상의 치료를 감당하지 못했다. 마지막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마지막 회진이 되었던 그날 나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 역시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할머니는 내겐 특별한 환자였지만 나는 장례식장에 갈 수가 없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살아계신 동안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 까지가 나의 역할이다. 떠나신 환자들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내가 더 빨리 심적으로 지치는 일이라며 나 자신을 변호했다.
장례를 마치고 몇 주 후 할머니의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방문했다. 따님을 마주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전에 내 눈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울고 말았다. 의사가 망자의 딸 앞에서 정신없이 흐느끼는 이상한 그림이 펼쳐졌다. 나는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는 커녕 내가 위로를 받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감정을 추스리고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의사는 돌아가신 환자의 가족을 위로하고 늘 객관적으로, 때로는 냉정해야 하는 의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나는, 성숙하지 못한 모습의 나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은 환자와 거리두기에 실패한 대가였다.
종양내과 의사로 20년 째 살아오고 있는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말기암을 진단받은 환자들에게 내가 해야하는 일은 늘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확진이 되었으며, 완치가 불가능하고, 치료의 목적은 살아있는 시간동안에 증상을 조금 완화하는 것이며, 그래서 생명의 남은 시간을 아주 조금 늘리는 것뿐인 힘든 치료를 감내해야 한다는 말을 해야한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희망을 심어주는 책임지지 못할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내가 매일 하는 일이다. 나는 완치가 불가능한 암환자들과 함께 항암치료를 이어가야 했으며 결국은 이기지 못하는 싸움에서 나만 살아남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리고 며칠에 한번씩 겪게 되는 내겐 특별했던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나는 또 나의 일을 해나가야 한다. 나의 가정으로 지쳐 돌아가는 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의 우울감을 가족들에게 전염시키지 않아야 했다. 환자들과 항암치료를 이어가며 짧게는 수 개월을, 길면 수 년을 반복해서 만나며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절망과 슬픔을 공유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환자들은 내게 더욱 특별한 사람들이 되어 간다. 그리고 환자와의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나는 그들과 이별할 때 힘겨움의 무게를 더욱 쌓아 간다. 그러하기에 내가 이 일을 오래 견뎌내며 할 수 있기 위한 나의 방어기제는 거리두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한 물리적인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시대에 살고있다.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숙제같은, 의사와 환자간의 정서적 거리는 어디까지가 적절한 것일까. 결코 짧지 않은 종양내과 의사로서의 삶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환자와의 정서적 거리두기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늘 그러하듯 나는 환자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또다시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