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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부재(不在)의 빛

  • 연도2024년
  • 수상은상
  • 이름송준호
  • 소속인하대병원

2001년 가을이었다. 초임 교수 발령받고 성남의 부속 병원에서 근무 시작한 해 정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해남에서 아들 따라 성남까지 온 할머니는 콩팥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셨다. “그 콩팥이라는 거시 망가지면 어떻게 되는 디야? 죽남?“


투석하시면 잘 사실 수 있다, 투석에는 혈액과 복막 두 가지가 있다, 긴 설명을 천장을 바라보며 묵묵히 듣고 계시더니 ”그럼 혀야지, 어떡하남.”하고 툭 결정하셨다. 할머니는 복막투석을 택했다. 배에 투석관을 심어드리면 집에서 매일 투석액을 갈아 주고 한두 달에 한 번 병원에 오시면 되는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나무 그늘 밑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봤다. 아들이 거기 쉬고 계시라 한 모양이다. 인사드리니 얼굴을 쓱 닦으며 “밥 먹으러 가시는 감?”하고 씩 웃는다. 흐릿한 가을 햇빛에 반사되는 작은 빛은 틀림없는 눈물이었다. 남쪽 끝에서 먼 길을 아들 따라다닐 팔자가 왜 서글프지 않겠는가? 툭툭 던지는 쾌활한 어투 때문에 삭인 아픔과 자기연민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리라. 남편을 잃고 해남에 내려가 자매를 업고 안고 키웠다 했다, 난데없는 투석 이야기에 하늘이 무너졌으리라.


2년 뒤 병원이 문을 닫게 되었다. 1980년대 어두운 시대의 사정으로 잉태된 분쟁의 씨앗이 커져 법적 소유권이 바뀐 것이다. 인천 본원으로 복귀하면서 환자분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해남에 계시니 그쪽 대학병원으로 보내드려야겠다 생각했다.

“병원도 망하는 감?” 그런 거 아니라 설명해 드려 본 들 싶어 가만히 있으니 위로하려 하신다. “우리 아들도 한 번 쫄딱 망했시. 올매나 속 상하던지...그래도 지나면 괜찮혀.”

“어떻게 하시겠어요?”

“멀 어쪄. 선상님 따라가야지... 나가 수절도 했는디...” 이건 수절 같은 게 아니라고 설명드렸다. “괜찮혀. 딸이 또 인천 살어. 아들이 그러는 디, 고속도로 쭈욱 달리면 거기나 여기나 같디여“


몇 년이 지나 연수를 가게 되었다. ”미국 어디 간디야? ... 돌아는 오시는감?“ 잠시 말이 끊어지시더니 살짝 심통이 나셨다. “선상님. 미국 가시면 갓김치는 영 못 드시것네?”

언젠가 할머니는 큰 유리병에 갓김치를 재어 넣어 보물인 양 보자기로 단단히 싸서 진료실 책상 아래 밀어 넣고 가셨다. 갓김치는 난생처음이었다. 어머니의 척박하고 고집 센 경상도 김치와 장모님의 청량하고 시원한 황해도 김치가 다인 줄 알았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빡빡한 질감과 혀를 찌르는 억센 맛에 한두 번 먹고 냉장고 깊숙한 곳에 넣었는데, 톡 쏘는 맛이 머리를 맴돌아 몇 번 꺼내 먹다 보니 맛을 들여 버렸다. 세상 김치는 다 맛이 다르고 다 맛있다. 게다가 김치는 만든 사람을 닮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공연히 그거 맛있었다 치레했다가 신이 난 할머니가 요 때가 제일 맛나다며 늦가을마다 큰 병에 담아 오시게 만들어 버렸다.


연수를 마치고 다시 뵈니 얼굴이 약간 더 검어졌다. 주름도 더 깊어지고 늘어졌지만, 억세고 투박했던 눈매에는 세월의 세례인 듯 부드러운 빛이 덧씌워졌다. 간만에 주치의 본다고 영국 여왕처럼 도도히 들어오시더니, 얼굴을 보자마자 금세 희색이 도신다. 털퍼덕 의자에 앉자마자 입담을 여셨다.

“선상님. 나만 남았어.”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우리 마실에, 전에 나 투석한다고, 금방 갈 거라고 입방아 찧던 것들 먼저 다 갔어...” 딸이 툭 친다. “좀 고만...”

“원래 투석하면 오래 사는 감?” 세련된 치레나 대화 같은 건 서로 거리가 먼 사이였다. 그래서 잘 안다. 그것이 고맙다는 마음을 에두른 표현이라는 걸... 미국 가 있는 동안 나 잘 지냈으니 괘념치 말라는 격려라는 걸...


할머니가 던진 말은 투석을 시작하는 환자분들께 꼭 들려드리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복막투석으로 마을 최고령자가 된 해남 할머니’ 이야기는 시간이 가면서 마늘 먹고 인간이 된 웅녀 같은 신화가 되어버렸다. 이 소소한 이야기는 열 번의 위로와 백 가지 설명보다 더 큰 마력이 있었다. 아무리 낙담에 빠진 환자분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입가에 용기의 빛이 스쳐 갔다.

15년이 넘어가자, 할머니의 복막 기능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메르스의 난리 통도 그리 잘 넘기시더니 20년이 되어가자 자꾸 복막염이 왔다. 두서너 번 연거푸 입원 하시더니 점차 진이 빠지시는 모양이다. 여든이 훌쩍 넘어 이제는 어디 다니시기도 힘들어하신다고 딸이 알려줬다. 아무래도 이제는 혈액투석으로 바꾸어야겠다 하니 “나 보기 싫은 갑다.”라고 섭섭한 표정이 역력하다.

“울 어머니, 선생님 보고 싶어 어쪄.“라고 말하는 딸에게 짐짓 눈치 주고 함께 달래고 설득해 결국 혈액투석으로 바꾸어 해남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사정인지 아들도 귀향한다고 하였다. 이제부터 그쪽에서 만난 선생님과 아들이 할머니를 지켜주리라.


한동안 딸이 자기 일로 병원에 오면 외래에 얼굴을 내밀고 안부를 전해 주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의 소용돌이 속에 그것도 끊겨버렸다.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30대 중반이었던 나도 60을 코앞에 두고 있다. 세월은 모든 걸 부식시킨다. 가끔 마우스를 쥔 손을 보고 놀란다. 언제 이렇게 거칠어졌을까?

할머니는 나이 먹으면 손부터 늙는다고 했다. 내 손이 곱다고, 배운 사람 손이라 그렇다며 마른 장작 같은 손가락으로 슬며시 만져보기도 했다. “울 마을에 이런 손 있는 사람 있었어. 광주에서 공부하고 온 미술 선상이지야.”

금방 문을 턱 열고 나타나실 것 같다. 늙은 손부터 타박하실 게다.


우리는 모두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님을 모시고,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삶을 익혀나간다. 의사들도 그러하다. 그러면서 점차 가녀린 소망의 끈을 잡고 남다른 슬픔과 고통을 견뎌내는 환자들의 삶을 내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열리면 환자들은 내가 알지 못한 것,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고 가르쳐 준다. 평범한 소망, 꺾이지 않는 희망, 불굴의 의지... 이런 귀중한 것들을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걸 왜 처음부터 깨닫지 못하는 걸까?


의사의 덕목은 조금씩 만들어지고 쌓여간다. 아이들이 사랑받으며 성장하듯 환자들의 믿음과 격려 속에 눈을 떠 간다. 수많은 인연의 고리로 만난 환자들은 차트 속 이름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새겨진다. 그 새김 속에는 회한과 후회가, 보람과 긍지가 깃들어진다. 새겨진 모든 것이 의사를 만든다.


우리는 서서히 사라진다. 모든 만남은 헤어짐으로 이어진다. 헤어짐은 부재를 남기고, 부재는 마음 한자리에 비석처럼 남아 더 생생해진다. 처음 뵐 때 예순 후반이었으니 정 할머니는 살아 계셔도 아흔을 훌쩍 넘기셨을 터이다. 그 늠름한 반생이 한 의사의 마음에 작고 잔잔한 부재의 빛으로 새겨졌다.

할머님이 마지막까지 사랑받으셨기를, 마음의 원을 모두 이루셨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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