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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전이(轉移)

  • 연도2024년
  • 수상금상
  • 이름임야비
  • 소속소속없음


 “늘 해 주시던 대로, 알아서 잘해주세요.”

 수년간 머리를 잘라 주셨던 원장님에게 말하며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안경을 벗고 거울을 희끄무레 바라보았다. 흰 가운을 목에 두른 나는 영락없는 의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짧게, 단정하게 잘라 주세요.”

 자못 비장한 투로 원장님께 요구했다. 2월 중순의 밤바람이 까까머리 속을 에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의사 면허증과 군고구마 한 봉지 그리고 속옷만 서른 벌 든 가방을 들고 언제 나올지 모를 병원으로 들어갔다. 인턴 생활의 시작이었다.


*


 햇병아리 의사의 첫 근무지는 소화기 내과 병동이었다. 3월부터 근무였지만 신입 인턴은 2주 전에 미리 병원에 들어가 인수인계를 받아야만 했다. 전임자는 나를 24시간 데리고 다녔다. 각 병동 위치부터 창고 뒤편 흡연실까지, 매일 20시간이 넘는 정규 스케줄부터 쪽잠을 잘 수 있는 자투리 시간까지, 교수님들의 취향부터 간호 보조 여사님들의 성격까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2주는 너무 짧았다. 

 전임자는 다른 병원 레지던트로 가야 했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나에게 환자 인수인계와 시술을 동시에 가르쳐 주기로 했다. 전임자는 초보 의사 티가 나면 한 달 내내 힘들 테니 최대한 경험 많은 의사처럼 행동하라고 했다. 고마운 충고였다. 빳빳한 흰 가운을 입고 들을 줄도 모르는 청진기까지 목에 걸었다. 그리고 가운 위 주머니에 새 볼펜을 색깔 별로 가지런히 꽂아 넣었다. 

 

 12층의 6인실 양지바른 창가 구석 자리. 검은 얼굴에 인상이 푸근하신 72세 할아버지. 간경화와 간암으로 장기 입원해 계신 분이었다. 정신도 멀쩡하시고 거동도 좋으시지만 복수(腹水)가 심해서 매일 복수 천자1)를 받아야만 했다. 주기적으로 경동맥 화학 색전술2)도 받고 계셨지만 hopeless 즉, 가망성이 없는 분이었다. 전임자는 할아버지를 내 첫 복수 천자 시술의 대상자로 정했다.


 “새로 온 인턴 선생님이구나!” 

 작전 실패. 그럴 만했다. 어색한 자세로 주사기를 들고 있는 나는 누가 봐도 샛노란 병아리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환하게 맞아 주셨다. 너무 오래 입원해 계셔서 그런지, 매달 초에 바뀌는 인턴에 대한 반감이 전혀 없으셨다. 할아버지는 한 달간 정이든 전임자에게 정겨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 천자 준비를 마친 나는 주삿바늘을 풍선같이 부풀어 오른 검은 배에 찔렀다. 실패.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재시도했다. 할아버지는 비명을 삼켰다. 그 비명은 배를 타고 내려와 내가 꽂은 주삿바늘 속에 피로 맺혔다. 너무 당황해서 얼른 바늘을 빼고 거즈로 눌렀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가락이 꼬이고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안면에 신경이 다 얼어붙었는지 비처럼 쏟아지는 식은땀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젊은 의사 양반. 당황하지 말고. 내가 여기 오래 입원해 있었는데, 처음엔 다 그럽디다.” 할아버지는 식은땀에 빠져 익사 직전인 병아리를 건져냈다. 

 “할아버지. 반대편 왼쪽 배로 해볼까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지만 젖어버린 목소리는 이미 계이름을 잊었다. 

 “알아서 잘해주세요.” 할아버지는 내 부담을 덜어주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경험 많은 전임자가 했다면 고통 없이 단번에 끝낼 시술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시술 의사의 교체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세 번째 시도 끝에 튜브로 노란 복수가 밝게 밀려 나왔다. 튜브가 연결된 바닥의 수액 통으로 뜨듯한 복수가 콸콸 쏟아졌다. 셋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액 통의 노란 아지랑이가 올라오면서 검은 풍선 같던 할아버지의 배가 서서히 꺼졌다. 비록 두 번의 실패는 있었지만 의사로서 첫 시술에 성공했다.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대부분의 장기 입원 환자들은 월초에 교체된 인턴 때문에 작은 불편이라도 생기면, 여과 없이 불만을 표출했다. 욕설은 물론 얻어맞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수치나 고무도 잠깐이었다. 인턴 생활에서 감정은 사치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한 달 뒤 나는 병원 전체에서 복수 천자를 제일 잘하는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하루하루 쇠약해졌고 눈에는 황달까지 꼈다. 속이 얼마나 탔는지 햇빛 한 뙈기 안 받고도 거의 흑인이 되어 있었다. 

 양지바른 창가 할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안스러워했다. ‘죽을 늙은이들 살리느라 젊은 의사들 다 죽어 나가네...’라고 하시며 노란 복수 통을 들고 나가는 나에게 고구마나 바나나 같은 식량을 챙겨 주셨다. 


*


 일반외과를 돌던 5월이 되어서야 첫 외박을 받을 수 있었다. 3개월 만이었다. 들어올 때 입었던 두꺼운 외투를 입고 바깥으로 나가 보니 봄이었다. 우선 머리를 깎으려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원장님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막 하산한 시커먼 구석기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검게 떡 진 머리와 노란 눈을 가진 나는 개선 가망이 없는 상태였고 존재 자체로 미용실의 매출 하락을 부추기고 있었다. 

 원장님은 머리카락을 쓸고 있던 어두운 표정의 미용 보조 아가씨에게 슬그머니 눈빛을 보냈다. 수습 아가씨는 얼른 앞치마와 빗자루를 던져버리더니 곧바로 말끔한 미용사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아장걸음으로 다가오는 거울 속 병아리. 나는 미용사를 교체해 달라고 원장에게 따지거나 당장 일어나 다른 미용실로 가지 않았다. 거울 속 샛노란 병아리의 빳빳한 흰 가운에 가지런히 꽂힌 새 가위와 빗 세트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내 머리칼을 만지는 손가락 마디는 모두 탈골되어 있었고 목소리에는 창백한 오한이 돌았다. 

 “알아서 잘해주세요.” 환하게 웃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짧았던 첫 외출을 마치고 인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동료들은 내 삐뚤빼뚤한 머리와 왼쪽 귀에 붙인 일회용 밴드를 보고 한바탕 놀려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여기저기서 삐삐가 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병동으로 신속하게 흩어졌다.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소화기 내과를 돌고 있는 동료에게 매일 복수 천자를 받는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간암이 뇌로 전이되어 신경외과 병동으로 전실했고, 그 뒤는 모른다고 했다. 

 몇 분 후, 일반외과 대회진을 따라 돌다 12층 6인실을 스쳐 지났다. 할아버지의 창가 구석 자리에는 젊은 여자 환자가 누워있었는데, 따듯한 봄의 노란 햇살이 자리 위로 한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


 1년의 인턴 생활을 마치자 다시 봄이 왔다. 레지던트 면접을 위해 또 오랜만에 단골 미용실에 갔다. 예전에 내 머리카락 끝과 귀 끝을 함께 잘랐던 미용 보조분은 상당히 멋진 헤어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그분 앞으로 대기 손님이 둘이나 있어서 지저분한 신석기인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전번처럼 미용실에 민폐를 끼칠 것 같아 창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밖에는 노랑이 가득 찬 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머릿속에 무엇인가 아른아른할 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서 잘라 드릴까요?” 봄처럼 밝은 그녀의 목소리는 힘들지만 활달했고, 손가락은 바쁘지만 노련했다.

 “네. 알아서 잘해주세요.”



주석:

1) 복수 천자(腹水 穿刺; Ascites Puncture, Paracentesis) ? 복강(배)에 복수 같은 저류액이 있는 경우 복벽에 튜브가 연결된 긴 바늘을 삽입하여 체외로 대량 배액하는 시술. 보통 간경화 환자의 복수 증상 때 진단과 치료 목적으로 자주 시행된다. 

2) 경동맥 화학 색전술: TransArterial Chemo Embolization(TACE) - 간 종양에 영양을 공급하는 동맥을 카테터 혈관 조영술로 찾아내어 종양에 직접 항암제를 투여한 다음 혈관을 막아버리는 비교적 간단한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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